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버드 (문단 편집) ===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다 === 1958년, 로버트 버드는 [[웨스트버지니아]]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현직 의원은 공화당 소속의 W. 챔프먼 리버콤(W. Chapman Revercomb)이었다. 당시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매튜 M. 닐리 상원의원의 사망으로 같은 날 재보궐 선거도 열려, 2석의 의석이 열렸는데, 이 때문에 로버트 버드는 당 내 경쟁 상대였던 제닝스 랜돌프(Jennings Randolph)와의 경선 없이 각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조지아 주 상원의원 선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제닝스 랜돌프와 로버트 버드가 같이 선거운동을 하던 도중 제닝스 랜돌프가 졸음운전을 해 교통사고로 죽을뻔 했지만(...) 본선은 아주 수월했다. 하필 1958년 민권법 투표에서 W. 챔프먼 리버콤이 찬성표를 행사하는 바람에 백인 비중이 높은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여론이 출렁였고 로버트 버드가 이를 이용해 리버콤을 상대로 59% 대 41%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obert Byrd 1964.jpg|width=100%]]}}} || || '''1964년의 로버트 버드''' || 그는 당선된 이후 [[린든 B. 존슨]]의 계파에 속했다. 1960년 대선의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는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했다.[* 우습게도 휴버트 험프리는 1948년 이후 상원에서 가장 강력한 민권법의 옹호자였다. 이는 험프리에 대한 지지보다는 [[존 F. 케네디]]를 막으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로버트 버드는 매섭게 치고 올라온 [[조지 월리스]]를 지지하지 않고 [[린든 B. 존슨]]을 지지하며 존슨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존슨의 인종 차별 철폐에는 가장 완강히 반대하는 상원의원 중 하나였다. 로버트 버드는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통과 전 14시간이나 필리버스터를 하며 법안 통과를 방해하였다. 버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권법은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다. 그는 1960년 민권법과 수정헌법 24조 통과에는 찬성했으나, 1957년 민권법, 1968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에 모두 반대 투표를 하며 민권 문제에 있어 당내 보수파로 분류되었다. 또 [[서굿 마셜]]의 연방대법관 인준을 거부하며 서굿 마셜이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1968년 대선에서 로버트 버드는 존슨의 재선을 지지했다. 존슨이 재선 불출마를 선언하자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했다. 로버트 버드는 케네디 형제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이번 선거 출마는 실수였다며 당원들에게 험프리 지지를 촉구하였다. 또 그는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 사건에서 멋모르는 대학생들이 일으킨 폭동을 경찰이 잘 진압한거라며 경찰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 68혁명 시위대에게 주적으로 꼽히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 미군의 베트남 전쟁 철수를 명시한 맥거번-햇필드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상원의원으로 지내면서 종종 자신의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지역구의 보수성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자랑하고 다닌 것으로(...) 동료 의원들에게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